뮤지컬

모태솔로 하남자가 나의 음악의 천사라고?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헬로_제이 2023. 7. 31. 09:00

잠실 샤롯데시어터에, 드디어 음악의 천사가 도착했다.
2023년 4월 16일을 끝으로 브로드웨이를 떠난 팬텀은, 2023년 3월 25일 부산 드림시어터를 시작으로, 2023년 7월 21일 서울 샤롯데시어터에 도착하여 밤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일단, 나는 팬텀의 지하세계에 정말 자주 가봤다. 
(극 속의 크리스틴보다도 더 많이..)
2004년의 영화 버전을 시작으로, 25주년 기념공연 영상, 2013년과 2020년의 내한, 그리고 이번 2023년의 한국공연까지. 
 
이 한국 공연에 의해서, 그 이전까지의 관람에서와는 전혀 다른 감상을 내놓을 수 있었다.

7월 29일 토요일 저녁 <오페라의 유령> 캐스팅보드.

 
내가 <오페라의 유령>을 좋아하는 이유는 '크리스틴'의 행동 때문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부재로, 그를 대신할 음악의 천사에게 의지하다, 그가 '비정상적'이라 느껴, 라울과 약혼하여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오히려 위험에 몰아넣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그 기회를 이용하여 그 상황 속에서 탈출하려고 하는 그 의지를 보이는, 대극장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강한 여캐의 모습으로 나는 그녀를 느껴왔다. 


누가 봐도 비정상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폭력적인 팬텀과 크리스틴 본인이 두렵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저 유령을 파괴할 본인의 방법만 밀어붙이는 이기적인 라울 사이에서 두려움에 떨다가 돈 주앙 공연을 기점으로 공연 속 캐릭터와 동화되면서 기존의 연약함과 거리가 먼, 농염하면서 섹시한 스탠스를 가는 모습은, 결말의 그녀의 선택이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정 자신의 선택이라고 믿게 만든다.

 

그러나 김주택 팬텀에 의해서, 나는 지금까지의 감상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실제 이름은 에릭이지만, 절대 극 중에서 한 번도 이름을 불려본 적이 없는) 팬텀은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서커스장의 철창 속에서 살며 인간에 대한 증오를 키워왔다. 그러기에 당연히, 일반적인 인간은 다가설 수 없는 어떤 위압감 같은 것이 느껴져야 했다.

특히, 크리스틴을 처음으로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넘버 'The phantom of the opera'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크리스틴에게 아버지의 부재를 대신하면서, 주연 메인 배우로서 그녀의 커리어를 완성시킴과 동시에 그녀를 어둠의 세계인 자신의 옆에 두고자 하는 그 위압감과 라울에 의해 그 모든 계획이 뒤틀려지면서 나오는 그녀에 대한 집착들이 흘러나오면서 가면 뒤에 숨겨진 본모습이 드러나야, 이 마지막 가면의 의미가 더욱 부각되는 것이다. 

 

하. 지. 만...

 

그는 그저 여자를 못 만나본 모태솔로, 자신의 욕망만 관철시키는 레전드 하남자 그 자체였다.

 

자기의 가면을 만지자 무차별적으로 화를 내다가도 크리스틴의 무반응(두려워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일지라도)에 무섭다는 듯이, 한껏 소극적으로 노래하는 모습은.. 팬텀을 무자비한 유령이 아닌 찌질이로 보이게 만들었다. 강압적으로 그녀를 끌고 갈 때는 언제고 그녀의 손만 닿더라도 흠칫거리며 놀라는 모습과, 마지막 반지를 돌려주려고 올 때 또 한줄기 희망을 가지려는 그 모습이.. 정말 내가 알던 팬텀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내가 본 팬텀만 이런 해석을 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조승우, 전동석, 최재림의 팬텀은 어떤 해석을 할지가 궁금하지만, 이 극이 라이선스인 점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저작권이 우리 한국의 창작진이 아닌 해외 본 프로덕션에 있다 보니, 상당히 정해진대로 따라야 한다. 해외 공연 시, 메인 주연 배우 한 명과 언더스터디 한 명을 두는 캐스팅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연기 톤과 제스처들이 정해진 채 올라갈 것은 예상하기 쉽다. 한국 공연 역시, 배우들 자체의 목소리 톤만 다를 뿐 대체로 비슷한 지시가 내려왔지 않을까.. 하기에.. 내 감상의 원인을 배우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

 

다른 원인을 찾는다면, 원 영어 버전의 공연을 계속해서 보던 나에게 한국어로 된 팬텀이 찾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번역,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원 내용이 최대한 손실되지 않게, 그리고 우리가 그 문화권을 그 말들로 오롯이 전달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뮤지컬에서는 '노래'하기 쉽게, 그 원 멜로디에 맞게 말을 바꾸는 것 역시 중요하다. 

 

브로드웨이 버전들을 봐오면서 원 가사들에는 노래마다 강조되는 센 발음들이 있고 그게 곡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한다고 봐도 무방한데, 그게 번역이 되면서 상당히 부드러운 한국어 발음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어순이 다른 것을 고려하여 번역한 것이겠지만, 배우가 연기를 하면서 감정이 터져야 하는 부분이 다른 부분으로 바뀌어 곡 느낌이 아예 달라진 것이다.

(제일 큰 부분은, 'Wishing you were somehow here again' 넘버에서 아버지의 무덤에서 노래하는 크리스틴의 가사 중, Companion 부분에 '무덤'이 들어가 너무 밋밋해진 것.)

 

또한, 의상도 짚고 넘어가고 싶다. 'The music of the night' 이후 크리스틴이 깨어나고 가면을 처음으로 벗긴 그 장면의 의상. 정말로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작곡하며 멋있게 일하다가 처음으로 사랑하는 상대에게 못 보일 모습을 보이고 불쾌하고 좌절하는 그 장면을 연기하는 배우한테, 무슨 청나라 시대 변발한 사람이 입을법한 옷을 입힌다고? 정말 진심이야? 이 중요한 장면을 살릴 생각이 있는 것인지.. 조명이 켜지고 무대 위의 팬텀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이 확.. 식어버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ㅠ

 

앙상블들, 조연 캐릭터들은 너무나도 맛깔나게 소화해 주셨다. 특히 크리스틴의 벙어리 하인 역인 극중극 속에서 정숙한 부인의 남편 역을 맡은 배우의 끝없는 저음과, 피앙지 박회림(a.k.a 림팍) 배우의 끝없는 고음 애드리브는 역시 대극장 뮤지컬의 꽃은 앙상블 배우님들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인지했다.

3월 공연인 부산을 위해 연습했던 것부터 지금 7월 말, 그리고 서울 공연이 끝날 때까지 같은 장면을 계속해서 연기해야 할 배우들의 고단함을 알기에 더더욱 그런 디테일들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주연 배우들은 그에 비해 충실한 감정선을 쌓아 올리는 게 아닌, 그저 그 장면을 해내야 하는 갑갑함에 더해 이 때는 이렇게 제스처를 취해야 한다는 느낌이 너무 가득 드는 모습이 보여.. 상당히 아쉬웠다. 말 그대로 기계적인 연기랄까..

(너무 오래 지속된 공연은 배우들을 지치게 해요..)

 

<오페라의 유령> 앞의 벨리곰과 20년 내한 공연 당시 굿즈인 곰돌이 팬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극장은 대극장이었다. 너무 멋진 샹들리에와, 가면무도회 장면들.

그리고 샤롯데시어터의 훌륭한 음향까지. 이게 뮤지컬이지! 할 정도로 그 웅장함에 감탄하고 싶다면, 그 거울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을 어떨까.